기쁨으로 설명하기에는 복잡하고, 두려움으로 말하기에는 벅찬 시간. ‘명예영국인’ 백진경이 써 내려가는 임신 8개월의 기록. 이달 <보그>의 임신과 출산 특집을 위해 ‘지금 임신한 누군가’를 떠올리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닿았다. 유튜브를 통해 런던에서 출산한다고 했으니 임신 8개월에 접어든 지금쯤이면 그곳에서 조용히 아기를 맞을 준비에 한창일 거라 여겼다.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서면으로라도 인터뷰하고 싶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했다. 백진경이 […]
기쁨으로 설명하기에는 복잡하고, 두려움으로 말하기에는 벅찬 시간. ‘명예영국인’ 백진경이 써 내려가는 임신 8개월의 기록.
Face to Face 하나는 카메라 앞에, 하나는 아직 뱃속에, 곧 서로를 마주할 두 초상. 화이트 셔츠는 조세문(Jose Moon).이달 <보그>의 임신과 출산 특집을 위해 ‘지금 임신한 누군가’를 떠올리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닿았다. 유튜브를 통해 런던에서 출산한다고 했으니 임신 8개월에 접어든 지금쯤이면 그곳에서 조용히 아기를 맞을 준비에 한창일 거라 여겼다.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서면으로라도 인터뷰하고 싶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했다. 백진경이 한국에 온다!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바로 그때.
이 여인을 설명하는 데는 국경을 몇 번쯤 넘어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미국으로 떠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를 가르치다가 2019년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일하기 시작했고 영국 생활과 영어를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낸 영상이 사람들의 눈에 들었다. 그렇게 어느새 ‘명예영국인’이 됐다. 알고 보니 <보그>와의 인연도 꽤 오래됐다. 2021년 패션 팀이 플러스 사이즈 모델 화보를 준비하던 당시, 섭외 창구가 바로 ‘더커브코리아’ 대표 백진경이었다. 본인의 설명을 빌리자면 유럽에서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자신은 플러스 사이즈면서 아시아인이기까지 해 ‘일타이피’로 일이 들어온단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높다. 자기 자신을 이렇게 거리낌없이 웃음거리로 삼을 줄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
영국에서의 새로운 출발은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틴더에서 만난 영국인 남편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결혼해 런던에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인생에 또 하나의 국적보다 훨씬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카메라 앞에서 “내가 엄마라니”라고 외치던 백진경은 오는 12월 딸 치즈를 만난다. 32세부터 아이를 기다린 시간은 2년. 임신 시점을 돌이켜보며 그는 “한국에서 3개월 동안 노를 열심히 젓고 갔는데, 영국에 입국한 그날 바로 아이가 생겼다”고 했다. 역시 백진경다운 임신 발표다. 태명은 ‘치즈’. 아이가 뱃속에 쫀득하게 잘 붙어 있으라는 뜻에서 캐러멜 같은 이름을 지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치즈를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을 떠올리며 지었다.
촬영장에서 만난 그녀는 휴대폰 화면 속에서 보던 것보다 더 백진경다웠다. 커다랗게 불러온 배를 감추기는커녕 기꺼이 드러냈고, 카메라 앞에서는 여전히 몸을 자유롭게 움직였다. 포즈 사이사이 농담을 던지고, 몇 마디 만에 현장에 있는 이들을 모두 자기 팬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엄마가 되는 중’인 지금도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뱃속의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모든 선택의 첫 문장을 반드시 ‘아이를 위해서’로 시작하지 않았다. 자신이 편안해야 하고, 자신이 즐거워야 하고, 자신이 잘 지내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테니까.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자주 잊는 말이다.
백진경은 곧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멀리 떨어진 런던에서 아이를 낳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향이고 이제는 자신의 일상이 자리 잡은 곳이라 해도 출산이라는 처음 겪는 일을 모국이 아닌 런던에서 맞는다는 건 분명 작은 용기로 설명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벌써부터 ‘엄마 백진경’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될 준비를 하는 대신, 백진경인 채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 듯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자라는 기묘하고도 경이로운 시간. 그 시간을 지나며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그럼에도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갖기 직전, 여전히 너무 자신다운 백진경과 <보그>가 나눈 대화다.
Full of Life 뱃속 생명만큼 지금의 자신도 충만하게 살아가는 백진경. 화이트 셔츠는 조세문(Jose Moon), 골드 귀고리는 톰 우드(Tom Wood), 목걸이와 브리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아이를 만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기다리던 두 줄을 처음 본 순간 어땠나요?
사실 드라마틱한 ‘임밍아웃’은 없었어요. 몸이 조금 이상하거나 가슴이 아플 때마다 임신 테스트기를 해봤지만 늘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날도 별생각 없이 루틴처럼 했는데 두 줄이 나온 거예요. 청소하던 남편을 불러서 “나 임신했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영국인 남편이 갑자기 한국말로 “진짜?”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울었어요. 남편은 정말 오랫동안 아이를 원했거든요. 반면에 저는 조금 복잡했어요. 물론 정말 원하던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내 전성기가 올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있었거든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예정된 계획도 많았고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한 챕터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다음 장으로 넘어가버린 기분이랄까요. 특히 일하는 여성이라면 ‘일이 끊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잖아요. 그런데 이제 출산이 임박해오니 그런 마음은 사라졌어요. 아마 지금이 아니면 안 됐으니까 치즈가 찾아온 거겠죠.
임신 전에는 꽤 험난한 시간을 예상했다고요. 실제 임신은 어땠나요?
다낭성 난소 증후군도 있었고 생리도 불규칙했고, 엄마도 자궁이 좋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임신하면 힘들 거라고 지레짐작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입덧도 거의 없었고 지금까지 아주 순탄하게 지내고 있어요. 사람들이 “6개월부터는 누워만 있게 된다” “숨이 차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겁을 많이 줬는데 저는 아직 꽤 많은 걸 할 수 있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아이에게 고마웠어요. ‘치즈는 이렇게 편하게 품게 해주는구나’ 싶어서.
그럼에도 임신한 몸은 분명 이전과 다르잖아요. 가장 낯선 변화는 뭐였나요?
아주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젖꼭지가 까매지고 커져요.(웃음) 자세도 완전히 달라지고요. 원래 운동을 오래 해서 몸을 쓰는 데 익숙했는데 배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허리에 아치가 생기더라고요. 몸도 계속 찌뿌둥하고, 재채기를 하면 소변이 찔끔 나올 때도 있어서 이제는 다리를 꼬고 해요. 방광이 반쯤만 차 있어도 치즈가 한 번 툭 건드리면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 하고요. 내 몸인데 내가 알던 몸과 다를 때 좀 묘해요.
매일 달라지는 몸을 보면서 속상한 순간은 없었나요?
별로 없었어요. 남편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소파에 누워 있어도 저를 보면서 계속 “Beautiful”이라고 해줘요. 제가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아름답대요.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저도 이 몸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전보다 커지고 달라진 모습까지 ‘지금의 나’로 받아들여요.
임신 후에도 끝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요?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 여전히 제가 먹고 싶은 것,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렇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임신하면 주변에서 “그건 먹으면 안 돼” “그건 하면 안 돼” 하는 말이 정말 많아지거든요. 물론 걱정해주는 마음은 감사하죠. 하지만 모든 선택에서 무조건 아이를 첫 번째에 놓으면서 나를 뒤로 미루고 싶지는 않아요.
Bare with Me 불러온 배 너머로도 변함없이 드러나는 백진경 특유의 유쾌한 에너지. 데님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실버 귀고리는 톰 우드(Tom Wood), 뱅글은 티링제이(Tee Ring Jay), 블랙 선글라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뷰티 취향이나 입맛도 ‘임신 전과 후’가 생겼나요?
원래 우디하고 묵직한 향을 좋아했는데 임신하고 나니 너무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오히려 전에는 잘 찾지 않던 달콤한 향수를 쓰게 됐어요. 스킨케어도 향이 강하지 않고 자극이 적은 제품을 찾게 됐고요. 피부도 훨씬 건조해져서 수분감이 많은 크림이나 미스트를 수시로 발라요. 입맛은 ‘한식파’가 되었어요. 영국에 살면서도 한국 음식을 특별히 그리워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임신하고 나서는 야채곱창 같은 자극적인 음식이 그렇게 생각나요. 평소라면 ‘먹고 싶군’ 정도인데 지금은 ‘이거 아니면 안 되겠다’는 순간이 와요.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임산부인 나’를 걱정하는 순간도 많아졌을 것 같아요.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제 컨디션과 상관없이 일단 임산부니까 못할 거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을 하거나 여행을 간다고 하면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하고요. 저는 진짜 괜찮은데 먼저 안 된다고 하면 답답할 때도 있어요. 제 몸 상태는 결국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임신을 하고 처음 알았어요. 내가 임신하면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함께 조심스러워진다는걸.
몸보다 마음이 더 어려운 순간도 있었나요?
솔직히 불안이에요. ‘내가 정말 엄마가 될 준비가 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해요. 혼자 철없이 산 시간이 워낙 길어서요.(웃음) 한 인간을 키운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잖아요.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만큼 내가 괜찮은 어른인가 싶을 때도 있고요. 그런 이야기를 남편과 자주 하는데, 남편은 예전부터 제가 자기 아이의 엄마였으면 좋겠다 싶었대요. 그 말을 들으면 조금 안심이 돼요. 내가 나를 못 믿는 순간에도 이 사람은 나를 믿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래도 임신 초기보다 지금은 치즈가 훨씬 ‘한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초기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잖아요. 태동도 없고,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이제는 움직임으로 계속 ‘나 여기 있어’라고 알려줘요. 치즈가 보통 밤 10시 반쯤 움직이는데 그 시간에 조용하면 제가 괜히 배를 건드려봐요. 그러면 또 움직여요. 그런 순간이 쌓이면서 처음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아이의 존재를 믿어야 했다면, 지금은 치즈가 계속 자기 존재를 알려주는 것 같아요.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에요.
엄마가 된 뒤에도 잃고 싶지 않은 ‘백진경’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엄마가 된다는 건 성숙해진다는 뜻이겠죠. 정말 어른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제 안의 철없는 모습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도전하는 걸 별로 무서워하지 않거든요. 생각나면 해보고, 부딪쳐보죠. 그런 부분은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계속 지니고 싶어요.
Shape of Now 임신 8개월의 몸을 온전히 남긴 포트레이트. 화이트 셔츠는 조세문(Jose Moon), 골드 귀고리는 톰 우드(Tom Wood), 목걸이와 브리프,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이제 정말 출산이 가까워졌어요.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자연분만을 계획하고 있어서 그런 영상을 많이 봤어요. 하얀 태지에 둘러싸인 아이가 울면서 나오는 모습. 아마 실제로 보면 가장 먼저 ‘너 이렇게 생겼구나’ 싶을 것 같아요. 저와 남편 중 누구를 얼마나 닮았을지도 궁금하고요.
출산을 앞둔 자신에게 한마디 해준다면요?
“겁먹지 마.” 사람들이 정말 겁을 많이 줘요. “자연분만 할 거야? 진짜 아파.” “뱃속에 있을 때가 천국이야.” 물론 모두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주는 거겠죠. 그런데 그런 말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출산을 앞두고 어떤 의식 같은 걸 하게 돼요. ‘이제 엄청난 고통이 오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는 계속 생각하려고요. ‘내 경험은 다를 수 있다.’ 임신과 출산을 무조건 고통, 고생, 힘듦으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결국 내 몸이 한 생명을 만들어 세상 밖으로 보내는 과정이잖아요. 그걸 조금 더 아름다운 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렇다면 지금의 백진경은 어떤 사람인가요? 곧 엄마가 될 백진경까지 포함해서요.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요. 엄마가 된 뒤에도 그건 똑같았으면 좋겠어요. 한마디로 ‘노빠꾸’.(웃음) 제가 말하는 용감함은 겁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주변의 잔소리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가보는 거죠.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살아왔듯 아이도 제 방식대로 잘 키우고 싶어요. 용감한 사람으로, 그리고 용감한 엄마로. VK